(경제)소셜 미디어와 나르시시즘 [조성진의 엉뚱한 뇌 이야기]

조성진 순천향대 서울병원 신경외과 교수가 뇌 이야기를 합니다. 뇌는 1.4 키로그램의 작은 용적이지만 나를 지배하고 완벽한 듯하나 불완전하기도 합니다. 뇌를 전공한 의사의 시각으로, 더 건강해지기 위해, 조금 더 행복한 인생을 살기 위해 어떻게 뇌를 이해해야 하고, 나와 다른 뇌를 가진 타인과의 소통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의학적 근거를 토대로 일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재미있는 이야기들과 함께 탐구해보겠습니다. 일주일 한번 토요일에 찾아뵙습니다.

[조성진 순천향대 부속 서울병원 신경외과 교수]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나르키소스는 매일 호수에 자신을 비춰보며 자신의 모습에 반하여 물에 뛰어들어 죽는다. 그 자리에 한송이의 꽃이 피었는데 이를 수선화(나르키소스)라 불렀다. 이 꽃의 꽃말은 자기 사랑과 고결, 그리고 내면의 외로움 등을 의미한다고 하는데 이것이 나르시시즘(자기애)의 기원이 되었다고 한다.

파울로 코엘류의 작품 ‘연금술사’의 머리 글의 내용 중에 사슴이 매일 호숫가에 와서 호수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나르시시즘에 빠졌는데 이 후 사슴이 죽어서 더 이상 호수에 오지 않자 가장 슬픔에 빠진 건 호수였다는 표현이 있다. 호수도 사슴의 눈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나르시시즘에 빠졌었다는 이야기를 적고 있다.

나르시시즘은 정신분석학적 용어로 지나치게 자신이 뛰어나다고 믿거나 혹은 지나치게 사랑하는 자기 중심적 성격과 행동을 말하는 것으로 인격장애의 하나로 보고있다. 나르시시즘 성격 장애는 여러 유형이 있지만 크게 취약한 (vulnerable)과 과대(grandiose) 나르시시즘의 두 그룹으로 나뉜다. 그러나 최신 정신 장애 진단 및 통계 매뉴얼, 5판 ( DSM-5 )은 나르시시즘 유형을 구분하지 않고 두가지가 동일한 것으로 분류한다. 취약한 나르시시즘에 대한 생각은 자기애적 특성을 가진 사람들이 괜찮기 위해서는 완벽해야 한다고 믿는 정신 역학적 생각에서 비롯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21세기 우리는 매스 미디어에서 소셜 미디어로 전환되는 시기에 살고 있다. 비교적 새로운 현상이지만 온라인으로 자신의 사진과 상태를 지속적으로 게시하여 올려 더 많은 친구와 추종자를 만들고 소셜 미디어 중독에 빠진 사람들을 흔하기 볼 수 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취약한 나르시시즘 특성을 가진 사람들에게서 나타날 수 있는데 이런 경우에는 좋아요 및 댓글 수에 대한 걱정을 하고, 부정적인 말에 민감하며, 질투의 감정을 경험하거나 나르시시즘이 심한 사람들보다 더 많은 시간을 온라인에서 보내게 된다고 한다. 반면에 과대 나르시시즘을 가진 사람들은 스트레스에 대한 회복력이 더 크고 우울증을 겪을 가능성이 적은 반면에 자신에 대해 비현실적인 우월감과 자신감을 갖고 타인에 대한 공간을 거의 나타내지 않으며, 수치심이나 죄책감이 거의 없다고 한다.

자기애가 있는 사람과 중독이 있는 사람은 성격이 비슷하다. 여기에는 공감 부족과 우월감을 추구하기 위해 스스로를 위험에 빠뜨리려는 의지가 포함된다. 한 연구는 나르시시즘이 있는 사람들이 알코올, 약물, 섹스 또는 소셜 미디어를 사용할 때 충동적이고 학대적인 행동을 할 가능성이 더 높아 중독 위험이 증가한다고 한다.

소셜 미디어의 장점은 이를 통해 친구, 가족 및 동료와 함께 주요 생활 사건 및 일상적인 사색을 공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전 세계 사람들과 쉽게 연결할 수 있으며 플랫폼을 전략적으로 사용하는 사람들은 온라인 팔로워를 개발할 수 있어 이를 통해 자신의 관계를 넓혀 나갈 수 있다. 그러나 소셜 미디어에 많은 수의 사진과 셀카를 게시한 사람들이 나르시시즘적 특성이 25% 증가했다는 보고가 있다.

자기애적 성격장애는 타인의 존경을 필요로 하는 반면에 공감이 부족할 때 발생한다. 좋아요나 조회수가 많을수록 사용자는 자존감이 향상될 수 있지만 타인에 대한 공감도 소중하다는 것을 잊지 말자.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인 자크 라캉은 그의 저서 ‘욕망 이론’에서 ‘인간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 라고 했다. 이 말 그대고 우리는 소셜미디어를 통해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고 있는 듯 하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남들이 기대하는 것을 위해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타인의 욕망과 나의 욕망 사이의 나르시시즘은 어쩌면 인간의 본성과 문명의 진화의 산물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오늘도 스마트 폰을 열어본다.

노희준 (gurazip@e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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